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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부가 아니라 광부였던 '클레멘타인'의 아버지
- 등록일 2024.10.31 / 조회 51
금 가격이 올해 들어 30% 넘게 상승했고, 앞으로도 고공 행진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 대통령선거로 인한 경제적 여파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등으로 인해 안전자산인 금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848년 미국과 멕시코가 국경을 두고 전쟁을 할 때, 어느 목수가 우연히 커다란 금덩이를 발견했다는 소문으로 1849년 미국 서부의 광활한 땅 캘리포니아에는 ‘골드러시’ 열풍이 일어난다. 부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이주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동부의 사업가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미 그리고 하와이와 중국 등에서 온 노동자, 공무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일확천금을 위해 직장을 포기한 사람들로 공장과 사무실은 문을 닫고, 선주들은 배 운항을 멈춰야 했다. 그들을 1849년의 연도 숫자를 따서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라고 불렀고, 황금을 좇는 사람들을 일컫는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해 미국 민요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바로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Oh My Darling Clementine)’이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로, 처음에는 일본어로 노래했으나 박태원(朴泰元, 1897~1921)의 번역으로 나라 잃은 겨레의 슬픔과 ‘클레멘타인’의 애조 띤 곡조에 맞춰 우리 정서에 맞게 개사됐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금은 주로 동굴과 강모래에서 체를 걸려 가려 낸 사금으로, 이주민들은 금을 캐기 위해 강 주변 오두막에 살았다. 클레멘타인의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포티나이너스’였던 아버지는 딸 클레멘타인을 강가에 데리고 나가 금을 채취했다. 오리를 데리고 놀던 클레멘타인은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급류에 쓸려 떠내려갔고, 아버지는 헤엄을 치지 못해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원래 가사의 번역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협곡 속에, 동굴 안에 광산을 캐면서/ 포티나이너 광부와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았다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 너는 영영 가 버리고 영원히 사라졌구나/ 너무 슬프구나, 클레멘타인.(후략)" 일확천금을 꿈꾸며 달려온 ‘포티나이너스’의 대부분은 금광을 캐느라 제대로 가족을 돌볼 수 없었고, 가난을 면치 못했다. 오히려 정작 부자가 된 사람들은 금광 주변 숙박업소와 술집 주인들, 그리고 질긴 천막용 천으로 광부들에게 청바지를 만들어 판 의류업자였다고 한다. 피땀 흘려 캐낸 금이 돈 많은 자본가들의 배를 불렸고, 정작 ‘포티나이너스’ 상당수는 힘든 노동으로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은 미국 서부 개척의 원동력이 됐다. ‘클레멘타인’은 1946년 존 포드 감독의 서부영화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 타이틀곡으로 쓰여 서부 개척시대 사람들의 정의를 지키는 그 시대의 정서를 알렸다. 또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프로 풋볼팀 이름이 ‘포티나이너스’다. 오늘날엔 ‘개척자들’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풋볼팀 이름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금값이 치솟는 시대에 노동 없이 금을 사서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현대인들에게 ‘포티나이너스’의 개척정신은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